정전의 밤/민지인 [서울신문 2025 신춘문예 - 동화]

정전의 밤/민지인 [서울신문 2025 신춘문예 - 동화]

입력 2025-01-01 00:04
수정 2025-01-0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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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 속 로아를 보며 말했다.

“솔, 빛, 언, 니. 따라 해 봐. 솔빛 언니!”

로아는 태어난 지 12개월 된 아현이의 여동생이다. 옆으로 늘인 내 입 모양이 웃겼는지 로아가 양 볼이 빨갛게 웃었다. 내가 아현이한테 영상통화를 거는 이유는 단 하나, 머리털이 새싹처럼 자란 로아가 보고 싶어서다. 아현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로아 있잖아. 엄마 나가니까 좀 전까지 엄청 울었어. 나도 언니인데 완전 서운해.”

아현이는 5학년이 되어 친해진 친구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어린 동생이 있다는 걸 알고 좋아졌다. 외동인 나는 아현이가 부러웠다. 심심할 틈이 없겠지?

“어디가 불편한 거 아니야? 배고프거나, 응가를 했던가?”

“그런가?”

아현이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는지 깜깜한 화면에 말소리만 들렸다.

“진짜네? 으. 냄새. 엄마한테 기저귀 가는 법 좀 물어보고 올게!”

전화를 끊자 밖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 아빠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빠가 고무장갑을 털어 개수대 위에 올려놓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았다.

“누구랑 무슨 통화를 그렇게 재밌게 해?”

“아현이.”

“아현이가 누구더라?”

아현이는 동그란 안경이 잘 어울리는 애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아빠는 깜빡깜빡한다. 작년에 부모님이 이혼한 뒤 나는 아빠와 둘이 산다. 그 이후 아빠는 한숨이 늘었고 나는 말수가 줄었다.

거실로 나가는 그때였다. 순식간에 모든 전등불이 꺼졌다. 에어컨 소리도 멈췄다. 베란다로 갔다. 아파트 전체가 잠든 듯 어둡고 고요했다. 베란다 문을 열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주민들도 나처럼 베란다로 나와 양옆을 기웃거렸다. 아빠가 투덜댔다.

“이 더운 날 정전이야? 시대가 어느 때인데….”

조금 있다가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파트 주민 여러분. 현재 정전의 원인을 파악 중이니 동요하지 마시고 차분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빠는 안방에서 손전등을 꺼내 빛이 천장을 향하도록 거실 탁자 위에 세워 두었다.

“기다려 보자. 금방 복구될 거야.”

나는 아현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괜찮아? 로아는?”

“울고불고 난리 났어. 너희 집도 정전이지?”

“응. 엄마한테 전화했어?”

“했지. 오는 데 30분은 걸린대. 아빠는 출장 가서 내일 오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기저귀 갈았는데 왜 울지. 잠깐만 지금….”

아현이가 뭘 잘못 눌렀는지 전화가 뚝 끊겼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현재 정전의 원인이 변압기의 용량 부족으로 보입니다. 한 시간 이내로 복구할 예정이오니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침착하게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한 시간이라니. 길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 애꿎은 노트북 키보드만 두드렸다. 오늘도 남은 회사 일이 많나 보다. 고민 끝에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나 친구네 집 좀 갔다 와도 돼?”

“지금은 위험하지.”

“친구가 동생이랑 둘만 집에 있는데 걱정돼서. 동생이 애기인데 계속 우나 봐. 응가를 해서 기저귀를 갈아 줬는데도 운대.”

아빠는 노트북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빠도 같이 가. 꼭 가야 한다면.”

그건 예상에 없었는데… 어쩔 수 없다. 아현이에게 아빠와 집에 가도 되냐고 묻자 집 주소가 적힌 메시지가 왔다. 아현이는 넉살이 좋아서 “아저씨! 다음에 로아랑 집 놀러 가도 되죠?”라며 호들갑을 떨게 분명하다. 그나저나 아현이의 집은 다른 동 18층인데…. 방금 나눈 말들을 주워 담고 싶었다.

우리는 휴대폰만 챙겨 집을 나섰다.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우리 집은 12층. 엘리베이터가 멈췄으니 1층까지 걸어 내려가야 한다. 아빠가 검은 반바지를 추켜올리며 휴대폰의 손전등 기능을 켰다.

“조심해서 걸어. 뛰지 말고.”

“아빠도 조심해.”

며칠 전 아빠는 콧등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났다. 일하다가 다쳤다고 했지만 아빠는 IT 개발자이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술 먹고 고꾸라진 게 틀림없다. 10층으로 내려가는데 밑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망할 놈의 아파트… 이십 년 넘으니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어. 염병.”

나도 모르게 아빠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팔이 축축했다. 아빠는 안심하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들겼다. 빛을 비춰 보니 강아지 버들이를 끌어안은 1005호 할머니다. 할머니가 버들이를 내려놓자 버들이가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었다. 할머니가 아빠에게 물었다.

“이 난리에 어디 가셔?”

“급하게 갈 곳이 있어서요.”

“아아. 근데 둘이 부녀지간이야?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몰랐네. 호호.”

나는 버들이를 쓰다듬었다. 버들이는 할머니가 노인정에 갔을 때 내가 종종 산책을 시키는 갈색 푸들이다. 내가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면 할머니는 나에게 버들이를 맡겼다. 우리는 버석거리는 나뭇잎을 밟고 화단의 꽃을 구경하며 친구가 되었다.

아빠가 버들이를 만지려 하자 버들이가 이를 드러냈다. 할머니가 말했다.

“얘는 남자 어른을 안 좋아해요. 영감이 살아생전 엉덩이를 자꾸 걷어차서 말이야.”

“예? 예….”

나는 웃음을 참으며 버들이의 턱을 긁어 주었다.

“버들아. 이 사람은 우리 아빠야. 아빠.”

그래도 버들이는 컹컹 짖으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버들이에게 아빠가 야근이 많다고 투덜댔는데 알아들은 걸까? 내려가려는데 할머니가 다시 불렀다.

“그런데 12층 아저씨. 한겨울에 애 슬리퍼만 신기지 마요. 예?”

아빠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아렸다. 맞다. 지난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다가 할머니한테 혼났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빠가 휙 뒤돌았다. 깜짝 놀라 계단 한 칸을 훅 올랐다.

“솔빛. 왜 겨울에 슬리퍼 신고 다녔어. 어?”

“슬리퍼가 편해.”

“구멍 뚫린 데로 눈이 막 들어왔을 거 아니야.”

“그게 좋은데. 구멍으로 눈이 숭숭 들어와서 발이 젖는 거.”

“좋다고? 그리고 저 강아지 이름은 어떻게 알아. 사나워 보이던데.”

“하나도 안 사나워. 아빠가 낯설어서 그래. 나랑 산책도 하는 사이인걸.”

나는 아빠를 앞질러 내려갔다. 아빠는 위험하다며 나를 등 뒤로 세웠다. 3층에 도착해 모퉁이를 도는 그때였다.

“아악!”

아빠가 뭔가와 부딪혀 무릎을 부여잡고 깽깽이걸음을 했다. 빛을 비춰 보니 킥보드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잠시 후 킥보드 앞 현관문이 열렸다. 얼굴을 빼꼼 내민 남자아이는 나보다 키가 한 뼘 작았다. 아빠가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얘. 여기다가 킥보드를 놓으면….”

“어? 우리 학원에서 피아노 제일 잘 치는 누나다!”

빛을 비춰 보니 같은 피아노학원에 다니는 파마머리 남자아이다. 3학년이던가. 내가 피아노 칠 때 창문으로 엿보던 아이. 갑자기 사탕을 한 주먹 주던 아이.

뭔가를 오물거리던 남자아이는 상황을 보더니 집으로 들어가 양손에 자기 주먹만 한 토마토를 들고나왔다.

“누나 이거 먹어! 아저씨도 드세요!”

우리는 얼결에 토마토를 받았다. 맞다. 이 아이는 피아노 연습을 안 했을 때 선생님께 사탕이나 초콜릿을 한 움큼 내민다. 잘못을 모면하려는 거다. 내가 잘못한 게 있을 때 아빠에게 학교에서 만든 엉터리 작품을 내미는 것과 똑같다. 남자아이가 집으로 들어간 뒤 아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코에 비하면 멀쩡해. 저번에 회식 끝나고 계단에서 엎어진 거 생각하면….”

아빠가 아차 싶었는지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뭐, 뭐를?”

“술 냄새 없애려고 집 앞에서 탈취제 뿌리는 것도 다 알아. 내가 바보야?”

아빠가 콧잔등을 실룩이니 반창고가 구겨졌다. 아빠는 말을 돌렸다.

“근데 쟤 너 좋아하나 보다. 널 보고 얼굴이 환해졌어.”

생각해 보니 아빠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탕을 줬으니까. 안 되는데…. 정말 날 좋아하나?

공동 현관문을 나가니 밤바람이 불었다. 땀으로 끈적해진 몸이 시원했다. 화단을 지나 단지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 미니 선풍기와 부채를 들고 더위를 식혔다. 우리도 그쪽으로 갔다. 아빠가 땀을 닦고는 토마토를 내밀었다.

“이것만 먹고 갈까?”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보니 토마토가 더 빨갛게 보였다. 토마토를 한 입 깨물었다. 새콤달콤했다. 내 옆에 있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자기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하늘을 가리켰다.

“엄마! 별! 별!”

우리는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별이 더 잘 보였다. 가만히 서서 눈을 감으니 바람 소리, 매미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한 발 가까이 오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

“근데 아까 걔가 고백하면 사귈 거야?”

“뭐?”

“걔는 공중도덕이 없어. 사과도 안 하고 말이야. 아빠는 반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토마토 내밀었잖아. 그게 사과야.”

“토마토가?”

“나도 그래. 저번 주 월요일 날 아빠한테 학교에서 만든 아크릴 무드등 줬잖아. 그날은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준 무선이어폰이 고장 난 날이었고.”

“그랬지.”

“이어폰, 친구가 고장 냈다고 했잖아. 사실 내가 고장 낸 거거든. 친구랑 장난치다가 떨어졌는데 내가 밟았어… 미안.”

“으이구. 근데 그 무드등 왜 불이 안 들어와?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말았는데. 혹시 아빠가 고장 냈나?”

“그거 처음부터 안 됐어. 내 거만 불량이었나 봐.”

“그럼 고쳐 달라고 하지 그랬어. 이따 고쳐 봐야겠네.”

나는 다시 하늘을 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빠한테 하나 더 말하고 싶었다. 아빠가 3층 아이와 나를 오해하니까.

“그리고 나 남자 친구 있어.”

“뭐? 누구?”

“김민찬이라고 있어. 우리 반. 근데 헤어질 거야. 걔 5반 유채린 좋아하는 거 같아.”

그때 아현이에게 ‘언제 오냐’는 톡이 왔다. 그게 구조 신호처럼 느껴져서 입을 쓱 닦고 아빠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빠는 김민찬이 어떤 자식이냐며 중얼댔다.

“빨리 가자. 응?”

아현이네 동 앞에 도착했다. 공동 현관문은 정전 때문인지 열려 있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는 18층. 시작이다! 1층, 2층… 5층에 올라서자 힘에 부쳤다. 아빠는 계단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아빠 옆에 나란히 앉았다.

“맨날 앉아만 있어서 그런지 힘들다. 솔빛이는 잘 걷네. 옛날이랑 다르게.”

“당연하지. 나 체육 엄청 잘해. 줄넘기도 연속으로 100개 할 수 있어. 몰랐지?”

“몰랐네. 이제 너가 앞장서서 가.”

아빠가 올라가는 계단에 불빛을 비췄다. 내가 한 발 내딛는데 아빠가 뒤에서 말했다.

“그, 있잖아. 아빠가 솔빛이에 대해 너무 몰라서 미안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이것저것 말 안 한 거 미안해….”

어두우니까 용기가 생겼다. 아빠도 그런 거겠지? 어두운 게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아빠와 내가 비추는 빛이 맞닿자 빛이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18층에 도착했다. 문밖까지 로아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았다. 아현이는 손전등으로 빛을 비추고 나는 코끼리 인형을 흔들며 로아를 달랬다. 아빠는 거실 매트 위에 로아를 눕혔다. 그리고 기저귀를 다시 확인했다.

“응가가 잘 안 닦여서 불편했나 봐. 그리고 기저귀는 이렇게 바짝 붙이면 안 돼.”

아빠는 로아의 엉덩이를 물티슈로 닦고 기저귀를 다시 갈았다. 아빠가 로아의 등을 토닥이며 아기 침대 위에 눕히자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빠가 속닥였다.

“솔빛이도 어렸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울었다고.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몰라. 그래서 기저귀 갈기는 항상 아빠 담당이었어.”

“솔빛이 애기 때 그렇게 까탈스러웠어요? 너 지금이랑….”

아현이가 시간을 끌더니 힘주어 말했다.

“똑같다.”

나는 아현이의 등을 때렸다. 로아는 울다 지쳤는지 새근새근 잠들었다. 아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전등불이 반짝 들어왔다. 우리는 소리 없이 환호했다. 그러다 아빠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아빠의 앞머리가 미역 줄기처럼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아빠는 ‘쉿’ 하고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나는 깨금발을 하고 거실 불을 껐다. 우리가 애써 재운 로아가 다시 깨면 안 되니까.

오늘은 나도 로아처럼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2025-01-01 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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